로쿠하라 단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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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쿠하라 단다이는 조큐의 난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교토에 설치한 기관으로, 조정 감시, 교토 경비, 서국 고케닌 통제 등을 담당했다. 호조 씨가 기타카타와 미나미카타를 번갈아 맡았으며, 몽골의 침입 이후 권한이 강화되어 고케닌 처벌과 재판 기능도 수행했다. 1333년 겐코의 난으로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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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쿠하라 단다이 - 호조 도키우지
호조 도키우지는 가마쿠라 시대의 인물로, 조큐의 난에서 공을 세우고 로쿠하라 탐제로 교토 치안을 담당했으며, 28세에 사망한 호조 야스토키의 장남이다. - 가마쿠라 시대 교토 - 조큐의 난
조큐의 난은 1221년 고토바 상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려다 실패하여 조정이 막부에 종속된 사건이다. - 가마쿠라 시대 교토 - 지묘인통
지묘인통은 진주후쇼군 후지와라노 모토요리의 개인 불당에서 유래된 일본 천황가의 계통으로, 고호리카와 천황부터 고코마쓰 천황에 이르는 계통을 지칭하며, 다이카쿠지 왕통과 양통질립 시대를 거쳐 북조를 지지하며 북조 천황을 배출했고, 현재는 후시미노미야 가문이 계승하여 현대 일본 왕실로 이어지고 있다. - 히가시야마구의 역사 - 기온 (교토시)
기온은 교토의 대표적인 유흥가이자 관광지로, 야사카 신사 문전 마을에서 시작되어 가모가와와 조화를 이루며 발전해 왔으나, 도시화로 전통 건축물 훼손 위기에 처해 국가 사적지구 지정 및 보존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야코 오도리와 게이샤 문화로 관광객을 유치하지만 과도한 관광객 증가와 전통 문화 보존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 히가시야마구의 역사 - 야사카 신사
야사카 신사는 교토 동부에 위치하며, 과거 기온샤로 불리다 메이지 시대에 개칭되었고, 스사노오노미코토 등을 주요 신으로 모시며, 기온마쓰리의 중심지이자 국보 본전을 포함한 중요문화재를 보유한 관광 명소이다.
로쿠하라 단다이 | |
---|---|
개요 | |
명칭 | 육파라 탐제 |
일본어 명칭 | 로쿠하라 탄다이 |
로마자 표기 | Rokuhara Tandai |
존속 기간 | 1221년 ~ 1333년 |
위치 | 교토 로쿠하라 |
상세 정보 | |
설치 배경 | 조큐의 난 이후 |
역할 | 교토의 경비 서쪽 나라의 통치 조정 감시 |
관직 | |
주요 관직 | 탐제 집사 평정중 |
역사 | |
1221년 | 조큐의 난 이후 설치 |
가마쿠라 막부 멸망 | 1333년 폐지 |
조직 | |
관할 | 교토 서국 |
종류 | 기타카타 (北方) 미나미카타 (南方) |
인원 | 각 방면에 탐제 1명 |
2. 설치 배경 및 목적
가마쿠라 막부는 조큐의 난 이후, 고토바 상황 측에 가담했던 구게(귀족)와 무사들의 영토를 몰수하여 고케닌(무사)들에게 은상으로 재분배했다. 이 영토들은 이전까지 막부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장원으로, 막부의 권한이 미치기 어려웠던 사이코쿠(서일본)에 특히 많았다. 재분배 결과, 이 장원들에도 지토(지방관)가 설치되었다. 이전까지 막부의 지배하에 있던 토지에 설치된 지토를 '''혼보 지토''', 새롭게 설치된 지토는 '''신보 지토'''라고 불렀다.
또한 막부는 조정 측의 움직임을 항상 감시하고 제어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조정의 움직임을 재빨리 파악하기 위해 시라카와 남쪽의 로쿠하라에 있었던 다이라 노 기요모리의 옛 저택을 개축해 관청으로 삼았다. 호조 야스토키와 호조 도키후사 두 사람이 로쿠하라의 북쪽과 남쪽에 머물며 이 작업을 이끌었다. 여기서 사이코쿠의 고케닌을 재조직해 교토 경비, 조정 감시, 군사 행동 등을 행했는데, 이것이 로쿠하라 단다이의 시초이다.[2]
2. 1. 조큐의 난과 막부의 권력 강화
조큐의 난 이후, 고토바 상황 측에 가담했던 구게(귀족)와 무사들의 영토가 몰수되어 고케닌(무사)들에게 은상으로 재분배되었다. 이 영토들은 이전까지 막부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장원으로, 막부의 권한이 미치기 어려웠던 사이코쿠(서일본)에 특히 많았다. 재분배 결과, 이 장원들에도 지토(지방관)가 설치되었다. 이전까지 막부의 지배하에 있던 토지에 설치된 지토를 '''혼보 지토'''라 부르는 데 반해, 새롭게 설치된 지토는 '''신보 지토'''라고 불렀다.또한 막부는 조정 측의 움직임을 항상 감시하고 제어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조정의 움직임을 재빨리 파악하기 위해 시라카와 남쪽의 로쿠하라에 있었던 다이라 노 기요모리의 옛 저택을 개축해 관청으로 삼았다. 호조 야스토키와 호조 도키후사 두 사람이 로쿠하라의 북쪽과 남쪽에 머물며 이 작업을 이끌었다. 여기서 사이코쿠의 고케닌을 재조직해 교토 경비, 조정 감시, 군사 행동 등을 행했는데, 이것이 로쿠하라 단다이의 시초이다.[2]
2. 2. 로쿠하라 단다이 설치
조큐의 난 이후, 고토바 상황 측에 가담했던 구게(귀족)와 무사들의 영토가 몰수되어 고케닌(무사)들에게 은상으로 재분배되었다. 이 영토들은 이전까지 막부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장원으로, 막부의 권한이 미치기 어려운 사이코쿠(서일본)에 특히 많았다. 재분배 결과, 이 장원들에도 지토(지방관)가 설치되었다. 이전까지 막부의 지배하에 있던 토지에 설치된 지토를 '''혼보 지토'''라 부르는 데 반해, 새롭게 설치된 지토는 '''신보 지토'''라고 불렀다.또한 막부는 조정의 움직임을 항상 감시하고 제어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조정의 움직임을 재빨리 파악하기 위해 시라카와 남쪽의 로쿠하라에 있었던 다이라 노 기요모리의 옛 저택을 개축해 관청으로 삼았다. 호조 야스토키와 호조 도키후사 두 사람이 로쿠하라의 북쪽과 남쪽에 머물며 이 작업을 이끌었다. 여기서 사이코쿠의 고케닌을 재조직해 교토 경비, 조정 감시, 군사 행동 등을 했는데, 이것이 로쿠하라 단다이의 시초이다.
3. 기능 및 역할
로쿠하라 단다이는 싯켄, 렌쇼 다음가는 중요한 직책으로, 전통적으로 호조씨가 맡아 기타카타(北方)와 미나미카타(南方)에 각각 한 명씩 배치되어 정무를 담당했다. 로쿠하라 단다이에는 호조씨 일족 중에서도 장래가 유망한 젊은 인재가 선발되는 일이 많았으며, 가마쿠라 막부로 돌아간 후에는 싯켄이나 렌쇼까지 승진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한 단다이 아래에는 효조슈 등 가마쿠라에 준하는 하부 조직도 설치되어 있었다.
로쿠하라 단다이는 조정이 아닌 막부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주요 기능은 사이코쿠에서 일어나는 지토와 고쿠시(고쿠시) 간의 갈등을 처리하는 재판, 교토 주변의 치안 유지, 조정 감시, 황위 결정 중개 등이었다. 특히 분에이 전쟁 다음 해인 1275년(겐지 원년)에는 고케닌 처벌 권한을 얻고 재판 제도가 강화되는 등 그 기능이 더욱 확대되었다.[7]
하지만, 권한에 따르는 실제적인 강제력은 충분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때로는 유력 사찰에게 처분을 내린 담당 관원이 당시 힘을 가지고 있던 승병의 압력으로 인해 귀양을 가는 일도 있었다.[7] 또한 막부에서 직접 파견된 특사(도시(東使)라고 불렸다)가 조정과의 직접 교섭을 하거나 단다이를 지휘하는 경우도 있었다.
3. 1. 초기 기능
조큐의 난 이후, 고토바 상황 측에 가담했던 공가와 무사들의 영지가 몰수되어 고케닌에게 상으로 재분배되었다. 이 영지들은 이전까지 막부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장원으로, 막부의 권한이 미치기 어려운 서국에 많이 있었지만, 재분배 결과 이 장원들에도 지토가 배치되었다. 또한 막부는 조정 측의 움직임을 항상 감시하고 제어할 필요성을 느꼈다.이에 따라 조정의 움직임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시라카와 남쪽의 로쿠하라에 있던 옛 다이라노 기요모리 저택 부지를 거점으로 삼아, 호조 야스토키와 호조 도키후사 두 사람이 로쿠하라의 북쪽과 남쪽에 주둔하여 서국 고케닌 감시 및 재편성과 조큐의 난 전후 처리를 포함한 조정 감시를 실시했다. 이것이 로쿠하라 단다이의 시작이다. 설치 초기에 막부와 로쿠하라 단다이 자신도 교토의 치안 유지는 케비이시의 역할이며, 자신의 권한 밖이라고 생각했다.[2]
그러나 조큐의 난 전후 처리의 일환으로 조정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존재였던 교토 주변의 군사 귀족을 해체하면서, 그들을 주된 공급원으로 삼았던 케비이시나 호쿠멘 무사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어 교토의 치안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대해 덴푸쿠 원년(1233년) 8월 15일에 나온 가마쿠라 막부의 추가법 63조에서는 관백 구조 노리자네와 단다이 호조 시게토키 사이의 협의를 반영하여, 낙중의 강도와 살인에 대해서는 로쿠하라 단다이도 케비이시청과 함께 처리하도록 하였다. 한편 분랴쿠 2년(1235년) 7월 23일에 나온 추가법 85조에서는 무사가 관여하지 않는 낙중의 칼부림과 살인에 대해서는 케비이시의 소관으로 하고, 교토 경비에 대해 기본적으로 조정 및 케비이시의 책임이라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무사가 관여하는 낙중의 칼부림과 살인에 대해서는 로쿠하라 단다이의 소관으로 해석될 수 있다.[2]
하지만 조정의 군사력 해체와 케비이시 강화를 통해 교토의 치안 유지를 맡기려던 막부의 두 방침은 모순되었고, 현실적이지 않았다. 가테이 4년(1238년) 2월 26일, 상락한 세이이타이쇼군 구조 요리쓰네가 케비이시 벳토로 임명되고(3월 7일 사임), 6월에는 이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가가리야(篝屋)가 설치되어 로쿠하라 단다이가 관리를 맡게 되면서, 로쿠하라 단다이가 교토 경비의 책임을 지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2]
3. 2. 기능 강화
분에이 전쟁 이후 1275년(겐지 원년), 고케닌 처벌 권한과 재판 제도 강화를 통해 로쿠하라 단다이의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7]분에이의 역 이후 1275년(겐지 원년), 로쿠하라 단다이는 고케닌 처벌 권한을 얻고 재판 제도가 강화되는 등 그 기능이 더욱 확대되었다. 조정 또한 로쿠하라 단다이에 교토 주변 치안 유지뿐 아니라 사찰 간 분쟁 해결, 악당 진압, 소령 소송 판결 집행을 위한 겐단권 행사를 기대하게 되었다. 막부가 조정과의 협력을 통해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에, 로쿠하라 단다이 역시 이러한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2]
129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정과 치천의 군은 본소일원지에서 본소와 대립하는 장관이나 재지영주를 악당으로 고소하거나, 조정에서 심리된 소령 소송(잡소사태)에서 경찰력과 군사력 약화로 판결 집행 능력을 상실했다. 이에 조정은 판결 집행을 위해 막부에 검단권 행사를 요청하는 칙명을 내렸고, 로쿠하라 단다이는 이를 수리, 집행했다. 로쿠하라 단다이는 고케닌 2명을 료시로 임명, 필요시 현지에서 경찰력 및 군사력을 행사하여 판결을 집행했으며, 피고가 저항하면 악당으로 간주하여 진압, 토벌했다.
막부 소속 고케닌이 토벌 대상이 될 경우, 막부는 집행 유예와 칙명에 따른 화여를 설득하는 정도였다. 고케닌은 막부의 보호를 받는 신분이었기에 문답무용의 집행 대신 유예를 받는 혜택이 있었다. 그러나 양통첩립 시기에는 천황과 치천을 내는 황통이 바뀔 때마다 이전 판결이 뒤집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현지 당사자들의 불만과 저항은 판결을 집행한 로쿠하라 단다이와 가마쿠라 막부를 향했고, 이는 악당 활동의 활성화 및 장기화, 나아가 토막 운동 참여로 이어졌다.[3][4]
3. 3. 조정과의 관계 변화
조큐의 난 이후, 막부는 조정의 군사력을 해체하고 케비이시를 강화하여 교토의 치안 유지를 맡기려 했으나, 이는 현실적이지 않았다. 1238년 구조 요리쓰네가 케비이시 벳토로 임명되고, 가가리야가 설치되어 로쿠하라 단다이가 관리를 맡게 되면서, 로쿠하라 단다이가 교토 경비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2]로쿠하라 단다이는 조정이 아닌 막부의 직접 지휘를 받았으며, 분에이의 역 이후 1275년에는 고케닌 처벌 권한과 재판 제도가 강화되었다. 조정 또한 로쿠하라 단다이에 대해 교토 주변 치안 유지, 사찰 간 분쟁 해결, 악당 진압 및 소령 소송 판결 집행을 위한 겐단권 행사를 기대하게 되었다.[2]
그러나 로쿠하라 단다이의 권한에 수반되는 실제 강제력은 충분하지 못했다. 1229년에는 엔랴쿠지 산하 히요시사 신인이 로쿠하라 단다이 부하에게 베이는 사건이 발생했고, 막부는 엔랴쿠지와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 로쿠하라 단다이 부하를 유배 보내기도 했다.[7]
또한 막부 특사(토시)가 조정과 직접 교섭하거나 로쿠하라 단다이를 지휘하는 경우도 있어, 로쿠하라 단다이의 권한은 항상 막부 중추의 제약을 받았다. 로쿠하라 단다이 직원 인사권 및 관위·관직 추천권은 막부가 가졌고, 소송 심리는 로쿠하라 단다이가 담당했지만 판결은 막부에서 내려졌다.[2]
1290년대 이후, 조정은 본소일원지에서 본소가 대립하는 장관이나 재지영주를 악당으로 조정에 제소하는 악당 진압이나, 소령 소송인 잡소사태에서 판결 집행 능력을 잃게 되었다. 이에 조정은 막부에 검단권 행사를 요청하는 칙명을 내렸고, 로쿠하라 단다이가 이를 수리·집행했다. 로쿠하라 단다이는 고케닌 2명을 료시로 임명하고, 필요시 현지에서 경찰력·군사력을 행사하여 판결을 집행했다. 피고 측이 저항하면 악당으로 간주되어 진압 대상이 되었다.[3][4]
양통첩립 시기에는 천황과 치천을 내는 황통이 바뀌면 판결이 뒤집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현지 당사자의 불만과 저항은 로쿠하라 단다이와 가마쿠라 막부를 향하게 되었고, 이는 악당 활동 활성화 및 겐무 신정으로 이어졌다.[3][4]
4. 조직 및 구성
가마쿠라 막부는 조큐의 난 이후 교토에 로쿠하라 단다이를 설치하여 조정을 감시하고 서일본 지역을 통치하였다. 로쿠하라 단다이는 싯켄, 렌쇼 다음으로 중요한 직책으로 여겨졌으며, 호조 씨 일족 중에서 유능한 인재가 선발되어 북방과 남방에 각각 1명씩 배치되었다. 이들은 조정 감시, 서일본 지역 고케닌 관리, 조큐의 난 전후 처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2]
로쿠하라 단다이는 처음에는 교토의 치안 유지를 케비이시의 역할로 간주하고 관여하지 않았으나, 조큐의 난 이후 교토 주변의 군사 귀족이 해체되면서 케비이시와 호쿠멘 무사의 군사력이 약화되어 치안이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1233년에는 강도와 살인 사건에 대해 케비이시청과 협력하여 처리하도록 규정되었고, 1238년에는 세이이 타이쇼군 구조 요리쓰네가 케비이시 벳토로 임명되고 로쿠하라 단다이가 관리하는 가가리야가 설치되면서 교토 경비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2]
로쿠하라 단다이는 조정이 아닌 막부의 직접 지휘를 받았으며, 서일본 지역에서 발생한 지토와 고쿠시 간의 분쟁 처리, 교토 주변 치안 유지, 조정 감시, 천황 즉위 결정 중개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1275년에는 고케닌 처벌 권한과 재판 제도가 강화되면서 기능이 더욱 확대되었다. 조정 또한 로쿠하라 단다이에게 치안 유지뿐만 아니라 사찰 간 분쟁 해결, 악당 진압, 소송 판결 집행 등을 기대하게 되었다.[2]
하지만 로쿠하라 단다이의 권한에는 한계가 있었다. 유력 사찰에 대한 처분을 담당한 관리가 승병의 압력으로 유배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막부에서 파견된 특사가 조정과의 직접 교섭이나 로쿠하라 단다이에 대한 지휘 권한을 갖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로쿠하라 단다이의 인사권과 소송 판결권은 막부 중추에 있었기 때문에, 로쿠하라 단다이의 권한은 막부의 제약을 받았다.
4. 1. 하부 조직
싯켄·렌쇼 다음가는 중직으로, 전통적으로 호조씨가 기타카타(北方)·미나미카타(南方)에 각 한 명씩 배치되어 정무를 행했다. 단다이에는 호조씨 일족 중에서도 장래가 유망한 젊은 인재가 선발되는 일이 많았으며, 가마쿠라로 돌아간 후에는 싯켄·렌쇼까지 승진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한 단다이 아래에는 효조슈 등 가마쿠라에 준하는 하부 조직도 설치되어 있었다.[7]로쿠하라 단다이의 북방과 남방에서는 전자가 상석('''싯켄 탐대''')으로, 도쿠소 가문이나 고라쿠지 류 등 호조 씨 중에서도 가문이 높은 자가 북방을 맡았다. 남방에서 북방으로 전임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 반대는 없었다. 남방은 결원이 되는 시기도 있었다. 다만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호조 무네노부나 호조 사다아키처럼 남방에서 싯켄 탐대가 된 자도 있다. 도쿠소 가문에 반항적이었던 나고시 류는 교토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경계했는지, 단 한 명도 탐대를 배출하지 않았다.
탐대는 싯켄·렌쇼 다음으로 중요한 직책으로 여겨져, 전통적으로 호조 씨에서 북방·남방 각 1명이 선출되어 정무를 담당했다. 탐대에는 호조 씨 일족 중에서도 장래가 유망한 젊은 인재가 선출되는 경우가 많았고, 가마쿠라로 귀환 후에는 싯켄·렌쇼까지 승진하는 자가 많았다. 또한, 그 아래에는 히키쓰케 도닌, 효조슈, 히키쓰케슈, 봉행인 등 가마쿠라 조직에 준하는 하부 조직도 배치되었다.
5. 역대 로쿠하라 단다이
역대 로쿠하라 단다이는 다음과 같다.
구분 | 대수 | 이름 | 가문 | 재임 기간 | 비고 |
---|---|---|---|---|---|
기타카타 | 1 | 호조 야스토키 | 得宗家 | 1221년 ~ 1224년 | 이후 싯켄 |
2 | 호조 도키우지 | 得宗家 | 1224년 ~ 1230년 | ||
3 | 호조 시게토키 | 極楽寺流 | 1230년 ~ 1247년 | ||
4 | 호조 나가토키 | 極楽寺流赤橋氏 | 1247년 ~ 1256년 | 이후 評定衆, 싯켄 | |
5 | 호조 도키시게 | 極楽寺流常盤氏 | 1256년 ~ 1270년 | ||
6 | 호조 요시무네 | 極楽寺流赤橋氏 | 1271년 ~ 1276년 | ||
7 | 호조 도키무라 | 政村流 | 1277년 ~ 1287년 | ||
8 | 호조 가네토키 | 得宗家 | 1287년 ~ 1293년 | 미나미카타에서 이동 | |
9 | 호조 히사토키 | 極楽寺流赤橋氏 | 1293년 ~ 1297년 | ||
10 | 호조 무네카타 | 得宗家義時流 | 1297년 ~ 1300년 | ||
11 | 호조 모토토키 | 極楽寺流 | 1301년 ~ 1303년 | ||
12 | 호조 도키노리 | 極楽寺流常盤氏 | 1303년 ~ 1307년 | ||
13 | 호조 사다아키 | 金沢流 | 1311년 ~ 1314년 | 이후 렌쇼, 싯켄 | |
14 | 호조 도키아쓰 | 政村流 | 1315년 ~ 1320년 | 미나미카타에서 이동 | |
15 | 호조 노리사다 | 極楽寺流常盤氏 | 1321년 ~ 1330년 | ||
16 | 호조 나카토키 | 普恩寺流 | 1330년 ~ 1333년 | 1333년 멸망 | |
미나미카타 | 호조 도키후사 | 1221년 ~ 1225년 | 1224년부터 1225년까지 호조 도키모리와 공동 재임. 이후 렌쇼 취임. | ||
| | 호조 도키모리 | 1224년 ~ 1242년 | 1225년까지 호조 도키후사와 공동 재임. | ||
| | 호조 도키스케 | 1264년 ~ 1272년 | 1270년부터 1271년까지 호조 요시무네와 공동 재임. 2월 소동으로 호조 요시무네에게 살해됨. | ||
| | 호조 도키쿠니 | 1277년 ~ 1284년 | 파면되어 히타치국으로 유배된 후 살해됨. | ||
| | 호조 가네토키 | 1284년 ~ 1287년 | 기타카타로 이동. | ||
| | 호조 모리후사 | 1288년 ~ 1297년 | |||
| | 호조 무네노부 | 1297년 ~ 1302년 | 이후 효조슈, 렌쇼, 싯켄 취임. | ||
| | 호조 사다아키 | 1302년 ~ 1308년 | 1303년부터 1308년까지 단독 재임. 1311년부터 기타카타 취임. | ||
| | 호조 사다후사 | 1308년 ~ 1309년 | 재임 중 사망. | ||
| | 호조 도키아쓰 | 1311년 ~ 1315년 | 1314년부터 1315년까지 단독 재임. 기타카타로 이동. | ||
| | 호조 고레사다 | 1315년 ~ 1324년 | 이후 렌쇼 취임. | ||
| | 호조 사다마사 | 1324년 ~ 1330년 | |||
| | 北条時益|호조 도키마스일본어 | 1330년 ~ 1333년 | 1333년 멸망. |
5. 1. 로쿠하라 단다이 기타카타(北方)
대수 | 이름 | 가문 | 재임 기간 | 비고 |
---|---|---|---|---|
1 | 호조 야스토키 | 得宗家 | 1221년 ~ 1224년 | 이후 싯켄 |
2 | 호조 도키우지 | 得宗家 | 1224년 ~ 1230년 | |
3 | 호조 시게토키 | 極楽寺流 | 1230년 ~ 1247년 | |
4 | 호조 나가토키 | 極楽寺流赤橋氏 | 1247년 ~ 1256년 | 이후 評定衆, 싯켄 |
5 | 호조 도키시게 | 極楽寺流常盤氏 | 1256년 ~ 1270년 | |
6 | 호조 요시무네 | 極楽寺流赤橋氏 | 1271년 ~ 1276년 | |
7 | 호조 도키무라 | 政村流 | 1277년 ~ 1287년 | |
8 | 호조 가네토키 | 得宗家 | 1287년 ~ 1293년 | 미나미카타에서 이동 |
9 | 호조 히사토키 | 極楽寺流赤橋氏 | 1293년 ~ 1297년 | |
10 | 호조 무네카타 | 得宗家義時流 | 1297년 ~ 1300년 | |
11 | 호조 모토토키 | 極楽寺流 | 1301년 ~ 1303년 | |
12 | 호조 도키노리 | 極楽寺流常盤氏 | 1303년 ~ 1307년 | |
13 | 호조 사다아키 | 金沢流 | 1311년 ~ 1314년 | 이후 렌쇼, 싯켄 |
14 | 호조 도키아쓰 | 政村流 | 1315년 ~ 1320년 | 미나미카타에서 이동 |
15 | 호조 노리사다 | 極楽寺流常盤氏 | 1321년 ~ 1330년 | |
16 | 호조 나카토키 | 普恩寺流 | 1330년 ~ 1333년 | 1333년 멸망 |
5. 2. 로쿠하라 단다이 미나미카타(南方)
취임 기간 | 이름 | 비고 |
---|---|---|
1221년 ~ 1225년 | 호조 도키후사 | 1224년부터 1225년까지는 호조 도키모리와 공동 재임. 이후 렌쇼에 취임. |
1224년 ~ 1242년 | 호조 도키모리 | 1225년까지는 호조 도키후사와 공동 재임. |
1264년 ~ 1272년 | 호조 도키스케 | 1270년부터 1271년까지는 호조 요시무네와 공동 재임. 2월 소동으로 호조 요시무네에게 살해됨. |
1277년 ~ 1284년 | 호조 도키쿠니 | 파면되어 히타치국으로 유배된 후 살해됨. |
1284년 ~ 1287년 | 호조 가네토키 | 기타카타로 이동. |
1288년 ~ 1297년 | 호조 모리후사 | |
1297년 ~ 1302년 | 호조 무네노부 | 이후 효조슈, 렌쇼, 싯켄에 취임. |
1302년 ~ 1308년 | 호조 사다아키 | 1303년부터 1308년까지 단독 재임. 1311년부터 기타카타에 취임. |
1308년 ~ 1309년 | 호조 사다후사 | 재임 중 사망. |
1311년 ~ 1315년 | 호조 도키아쓰 | 1314년부터 1315년까지 단독 재임. 기타카타로 이동. |
1315년 ~ 1324년 | 호조 고레사다 | 이후 렌쇼에 취임. |
1324년 ~ 1330년 | 호조 사다마사 | |
1330년 ~ 1333년 | 北条時益|호조 도키마스일본어 | 1333년 멸망. |
6. 멸망
1333년(겐코 3년 / 쇼쿄 2년),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운동으로 겐코의 난이 일어났다. 명령에 호응한 아시카가 다카우지, 사사키 도요, 아카마쓰 노리무라가 교토를 침공하였고, 호조 나카토키 등은 수도에서 쫓겨나 결국 모두 사망하였다.[5]
같은 해 1월, 구스노키 군과 로쿠하라 군의 전투 중에 아카마쓰 노리무라가 막부에 반기를 들고 하리마국에서 거병했다.[5] 로쿠하라는 아카마쓰 군을 토벌하기 위해 사사키 도키노부 등의 군을 파견했지만, 마야성에서 대패하여 교토로 패주했다.[5] 이후 세가와 전투에서도 아카마쓰 군이 승리하여 동쪽으로 진군했다.[5] 5월에는 단바를 향해 진군하고 있던 막부측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 측에 가담할 것을 결의하고 교토로 돌아와 로쿠하라를 공격했다.[5] 결국 5월 7일, 남북 양 탐대는 로쿠하라를 탈출하여 로쿠하라 단다이는 멸망했다.[5]
참조
[1]
서적
六波羅探題の研究
続群書類従完成会
2005-04
[2]
논문
六波羅探題の成立と公家政権
清文堂出版
2016
[3]
논문
鎌倉後期の悪党検断方式に関する覚書
清文堂出版
2016
[4]
논문
勅命施行にみる鎌倉後期の六波羅探題
清文堂出版
2016
[5]
웹사이트
高槻市史 第2章 南北朝内乱期の高槻地方 第1節 北摂地方の戦乱
https://www.library.[...]
高槻市立図書館
2021-03-31
[6]
간행물
鎌倉将軍・執権・連署列伝
新人物往来社
2011-10
[7]
문서
1229년 엔랴쿠지 관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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